가능하면 영국은 피하고 싶었다. 단일팀으로서 조직력이 모래알 수준이라고는 해도 홈 이점을 절대 가벼이 여길 순 없는 법이다. 적지에서 괜히 주눅 들어 제 플레이를 펼쳐보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웬걸,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홍명보호는 영국을 맘껏 주물렀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경기력, 보는 내내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이로써 15승 6무, 21경기 연속 무패다. 이미 패배를 잊은 지 오래, 적지에서 난적 영국까지 물리친 홍명보호,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를 읊어볼까 한다.
조직력의 승리, 영국을 사방에서 옥죄었다.
상대팀엔 우리가 동경하던 EPL 선수들이 즐비했다. 개인적인 기량이나 네임벨류 면에서 열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7만 여 팬들이 운집한 적지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 또한 엄청난 부담이었다. 10년 전, 붉은 악마의 뜨거운 함성을 등에 업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걸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려나 모르겠다. 그 속에서 대표팀이 믿을 구석이라곤 2009년부터 '홍명보호'라는 이름 아래 차곡차곡 쌓아온 조직력뿐이었다. 그리고 굳게 믿었던 조직력이 결국엔 4강행 티켓을 안겨주었다.
조직력은 영국을 사방에서 옥죄던 장면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완벽에 가까웠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울컥할 정도였다. 동료들 사이의 거리는 적당히 유지되었고, 공격-미드필더-수비의 라인 간격은 좁게 형성됐다. 그 덕분에 어디에서든 손쉽게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공격수들이 앞으로 전진하며 상대의 패스를 차단해내는 장면에서는 미드필드와 수비 라인이 열심히 올라가 사이 공간을 최대한 좁혔다. 수비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수비 라인을 무너뜨린 뒤 슛팅을 가져가려던 상대 선수를 태클로 저지하던 수비형 미드필더 기성용의 모습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라운드 곳곳에 대표팀의 흰색 유니폼이 더 많이 보였다는 것, 패스 루트를 찾기 힘들어하던 영국이 주로 롱패스에 의한 공격 전개를 시도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홍명보호가 조직력으로 승부했다는 증거였다. 또, 막판에 기성용이 근육 경련으로 쓰러졌듯, 선수들 하나하나가 죽어라 뛰며 본인의 역할을 소화해내지 못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경기 내용이었다. 이런 형태를 90분을 넘어 연장전까지 총 120분 동안 흐트러짐 없이 유지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조직력, 고민거리였던 공격에서도 빛을 발했다.
본선에 돌입하자, 직전 평가전과는 달리 정적인 움직임에 그친 공격진이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됐다. 기대했던 만큼 상대 진영을 헤집어놓지 못했고, 파괴력은 반감됐다. 상대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진영에 동료 공격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고민거리의 핵심, 구자철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보다 조직적인 형태로 움직이며 그 선수의 짐을 분담해줘야 했는데, 예선 세 경기에서 보여준 개개인의 산발적인 공격 형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 결과 1.5선 이후 공격 전개의 완성도는 심각할 정도로 떨어졌다.
그랬던 홍명보호가 드디어 속 시원한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볼을 소유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 비어있는 공간으로 공격수들이 침투하며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측면에서의 크로스 상황에서도 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상대를 흔들었다. 그 덕분에 패스가 보다 매끄럽게 전개됐고, 공격을 마무리하는 슛팅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선제골까지 터뜨리며 경기를 쉽게 가져갔다.
'선발 출장' 지동원, 통쾌한 선제 펀치를 날렸다.
예선 세 경기 중 멕시코전, 가봉전, 두 경기에서 득점포가 침묵했다. 특히 한 수 아래로 여겼던 가봉에까지 골을 뽑아내지 못한 것을 두고 선수 기용에 대한 반문도 많이 제기됐다. 그동안 고수해왔던 원톱 박주영, 그리고 그 밑에 배치된 김보경-구자철-남태희(백성동)의 전형이 가봉전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 탓이 컸다.
공격 진영의 구성은 이번 영국전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대로 박주영일지, 아니면 지동원이나 김현성으로 대체할지를 두고 여러 예측이 오갔다. 뚜껑을 열자, 홍명보 감독의 선택은 '그럼에도' 박주영이었고, 김보경 대신 지동원을 내세우며 변화를 시도했다. 홍명보 감독은 평가전부터 대회 내내 중앙에 배치됐던 구자철을 왼쪽으로 돌리고, 뉴질랜드전에서 왼쪽에 세운 적 있었던 지동원을 중앙에 세워 경기를 시작했다. 박주영-지동원의 공존, 광저우 커넥션이 영국의 카디프 시티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여기에 구자철-지동원의 스위칭까지 가미되자, 영국은 혼란 속으로 몰렸다.
하지만 지동원도 믿음직스러웠던 카드라고 보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지난 시즌, 꾸준히 경기에 나서지 못해서였을까. 서브로 출장했던 지난 경기들에서 볼을 받아낼 때의 퍼스트 터치며, 동료가 볼을 잡았을 때의 쇄도며, 한창 때의 그와 비교했을 때 감각이 많이 무뎌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홍명보 감독은 그에게 선발 출장이란 파격적인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전반 29분 경기장을 찾은 7만 여 팬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이 덕분에 직접 뛰는 팀 동료들 사이에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형성됐다는 생각이다.
뜻하지 않은 교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승리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전반 5분, 의료진이 그라운드로 들어섰고, 김창수가 땅을 짚는 느린 화면이 반복해서 나왔다. 순간 심상치 않은 부상임을 감지했고, 이내 의료진은 벤치를 향해 두 팔로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X 사인을 보냈다. 국가대표의 부름은 받았어도, 좀처럼 그라운드를 밟기 힘들었던 김창수가 드디어 이번 대회를 통해 빛을 발하나 싶었다. 안정된 공-수 밸런스를 바탕으로 선보이는 뛰어난 러닝 크로스는 평소 K리그를 보지 않는 팬들의 시선을 막 사로잡기 시작했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후반 17분에는 정성룡이 부상으로 실려나갔다. 크로스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상대팀 리차즈와 충돌하면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올림픽 일정 동안 그의 능력이 특별히 부각될 기회는 없었는데, 오늘 대표팀이 두 번의 PK를 내주면서 일종의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아시다시피 정성룡은 PK 방어율이 높은 골키퍼는 아니다. 그랬던 그가 렘지에게 내준 두 번의 PK 중 두 번째 슛팅을 막아낸 것, 그 장면에서 역전골을 내줬더라면 홍명보호의 항해도 여기서 그쳤어야 할지도 모른다. 뛰어난 활약을 보이던 순간, 그라운드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들 대신 오재석과 이범영이 투입됐다. 세 장이 허락되는 교체 카드, 그것도 토너먼트 경기로 연장 승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 게다가 3일 간격으로 네 경기째를 치러 체력적인 부담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서 뜻하지 않게 교체 카드를 두 장이나 꺼내 들어야 했다. 최근 경기에 나설 기회가 적었던 선수들인 만큼 감각적인 부분도 우려스러웠는데, 그들이 K리그에서 정말 열심히 준비하던 모습 그대로를 잘 해내며 4강행에 일조했다. 특히, 올림픽은 본인에게 '꿈의 무대'라던 오재석을 꽤 오랜 기간 지켜봐 왔는데, 비록 PK를 내주긴 했으나 깨알 같은 할약으로 팀 승리에 공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참으로 흐뭇했다.
승부차기 승리, 2년 전 아픔을 말끔히 씻어냈다.
홍명보호의 승부차기라고 하면 2년 전 그날의 기억에 속이 쓰리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향해 순항하던 홍명보호의 발목을 잡았던 UAE전, 연장전까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자 홍명보 감독은 이범영을 교체 출전시키며 승부차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연장 후반 종료 직전 통한의 결승골을 내주며 홍명보호는 침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오늘도 마지막 순간, 남태희가 내준 프리킥 상황까지 가슴 졸여야 했다.
이윽고 돌입한 승부차기. 네 번째 키커까지 양 팀 모두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살얼음판 걷는 승부 속, 영국의 다섯 번째 키커 스터리지의 킥이 이범영의 선방에 걸렸고, 마지막 키커 기성용의 킥이 골망을 가른 순간 메달을 향해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었다. 2년 전, 결승골을 허용한 장본인이라도 된 마냥 본의 아니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감수해야 했던 이범영은 묵묵히 기다리며 쌓아온 실력을 이제서야 뽐낼 수 있었다. 그것도 아시아를 비롯 전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이라는 훨씬 더 거창한 무대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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