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철원

[스크랩] 한반도의 중심 철원 궁예의 태봉국?

달림토미 2011. 10. 22. 07:27

    한반도의 중심 철원 궁예의 태봉국

강원도 철원. 철원은 6·25 전쟁 당시 남과 북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곳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책을 펼쳐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한 국가의 수도로서 한반도 통일을 꿈 꾸던 도시이기도 하다. 철원은 수도로서의 역사가 짧았던 탓인지 2000년대 고려라는 중세 국가가 조명 받기 전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잊혀진 역사를 되새겨 보기 위해 2010년 4월16일 철원 평야를 거닐었다.

▲ 남대천 일대의 북녘 DMZ모습 

 

■ 궁예의 나라 '태봉국'

신라의 치세 말기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한 사내가 나라를 건국했다. 이 외눈의 사내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안했던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믿었던 미륵불을 자처했지만 실상 그가 죽었을 때 자비로운 미륵이 아닌 폭정을 일삼은 왕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대부분의 왕조가 멸망했을 때 일반적으로 망국의 한과 관련한 전설이 남아있게 마련이지만 그는 백성들에게 괄시를 받다 죽었다는
전설만 남아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짧지만 강인한 인상을 남긴 이 사내의 이름은 궁예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어디 가문의 후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원·경기·황해 지역을 중심으로 서기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만주와 연해주를 다스렸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서기 911년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태봉이라고 바꿨다. 그러나 서기 918년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 아스라이 잊혀진 궁예의 꿈
궁예의 태봉국 흔적을 찾아 철원을 방문했을 때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느낌만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고도
역사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반해 철원은 흔적은커녕 남북 분단의 아픔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번화하지 않은 도심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군인과 어딘지 모르게 침묵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그랬다.

그리고 궁예의 흔적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태봉국 도성조차도 휴전선 안에 있는 군에서 설치한 전망대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전망대도 미리 예약을 통해 군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방문할 수 있다. 그나마 전망대에서 바라본 태봉국 도성 궁궐터는 휴전선과
경원선이 갈라놓고 있어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짧은 역사만큼 궁예에 대한 흔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 풍천원 부근 태봉국 도읍지 내 석등

 

그 사내’는 철원 도피안사()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쇠로 된 몸. 군더더기 없는 몸매. 수수한 옷차림. 씩씩하고 당당한 기상. 갸름한 볼에 적당히 붙은 살집. 이 ‘무쇠 사나이’는 1100년이 넘도록 ‘무()’자 화두 하나 들고 묵언정진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 이 저잣거리의 들끓는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언제 저 건너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피안에 이르는 절집’이라는 이름은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서기 865년 세상은 어지러웠다. 관리들은 백성의 피를 빨았다. 도적들은 날뛰고, 떼강도가 설쳐댔다. 신라 경주귀족들은 권력다툼에 날 새는 줄 몰랐다. 나라는 있으나마나였다. 철원사람들은 ‘변방의 우짖는 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메시아’를 기다렸다. 말세에 나타난다는 미륵부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결국 밥술깨나 먹는 1500명의 농민이 한 푼 두 푼 모아 ‘불상’을 모시기로 했다. 불상은 ‘쇠 둘레’ 사람들답게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담백한 옷 주름선. 영락없는 농투성이들이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905년 궁예(?∼918)가 철원에 미륵왕국을 건설했다. 철원농부들이 ‘쇠부처’를 모신 지 딱 40년 만이었다. 철원사람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맞았다. 궁예는 신라왕족의 후예였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왕궁에서 쫓겨났다. 비렁뱅이, 나무꾼 등 밑바닥생활을 하며 겨우 배고픔을 달랬다. 절에 들어가 중이 된 것도 어쩌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가슴속에 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삼한통일’, 또 하나는 ‘모두 다 잘사는 미륵세상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궁예()라는 이름도 ‘활 잘 쏘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다.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궁예는 처음 영월 평창 울진 강릉 등 동쪽을 휩쓸며 점점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의 주력은 대부분 농민군이었다. 궁예는 그 누구보다도 ‘새 세상’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궁예는 그들과 똑같이 자고 뒹굴며 거친 밥을 먹었다. 896년 마침내 개성의 왕건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것은 궁예가 육지뿐 아니라 해상세력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을 뜻했다.

‘신라 말/고려 초/풍운아 궁예/역사에 반눈 감고/말세 미륵을 참칭한 업보로/누대 퇴락한 왕조의 말고삐를 잡고 떠돌다가/태봉국 황성옛터에 눈 오는 밤/평복하고 실실 반눈 뜬 채/홀로 등극한 지존이 되어/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수잡고/천하명당 DMZ에 철저히 뼈를 숨기다’ <이원철의 ‘DMZ·40-궁예’에서>

○ 가는 곳마다 기기묘묘한 바위 그리고 궁예의 흔적

철원평야는 한반도의 ‘뱃살부위’나 같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이곳을 차지하는 자는 배고픔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궁예가 이곳에 도성을 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총칼을 디밀었다.

철원평야는 6·25전쟁으로 허리가 동강났다. 또 그 남은 벌판마저 한탄강(140km)이 남북을 가르며 흐른다. 강 동쪽은 산악이고, 서쪽이 들판이다. 강은 평평한 들판을 마치 ‘대못으로 깊게 후벼 판 듯’ 흐른다. 양쪽 둑이 깎아지른 기암절벽이다. 양수시설이 없다면 아무리 물이 많아도 ‘그림의 떡’이다. 조선시대 농부들이 그 강물을 댈 수 없어 탄식했다고 해서 한탄강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있다. 우스개 말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탄강은 ‘큰 여울’이라는 뜻. 그만큼 굽이굽이 절벽을 휘감고 돌아간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평강-철원을 거쳐 연천에서 임진강과 몸을 섞는다.

궁예길은 바로 그 한탄강 둑을 따라 걷는 길이다. 절벽 위 어깨를 ‘즈려밟고’ 걷는 길이다. 한탄대교가 있는 승일공원에서 시작한다. 승일교(총길이 120m)는 한탄대교 바로 옆에 있다. 반은 북한이 러시아식으로 짓고, 나머지 반은 남쪽에서 미국식으로 지었다. 철원이 6·25전쟁 이전에 북한 땅이었던 탓이다. 전쟁 이전에 북쪽에서 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된 것을 전쟁이후 남쪽에서 마무리했다. 철원사람들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북쪽의 김일성() 주석의 가운데 한 자씩 따서 ‘(승일교)’라고 했다고 말한다. 그럴듯하지만 막상 다리이름은 한글로 돼 있다.

궁예길은 가는 곳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꺽정이 무술을 닦았다는 고석정(), 명주실 꾸러미가 끝없이 풀릴 정도로 깊다는 송대소, 수염고드름 위로 왁자하게 쏟아져 내리는 직탕폭포….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 얼음 위 눈밭엔 사람발자국으로 어지럽다. 깎아지른 절벽 틈새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적지 않다. 돌도끼 마제석기 타제석기 조개껍데기 물고기 뼈 등이 심심찮게 나온다. 옛날 철원평야엔 고인돌도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엉컹퀴야 엉겅퀴야/철원평야 엉겅퀴야/난리통에 서방 잃고/홀로 사는 엉겅퀴야//갈퀴손에 호미잡고/머리 위에 수건 쓰고/콩밭머리 주저앉아/부르느니 님의 이름//엉겅퀴야 엉겅퀴야/한탄강변 엉겅퀴야/나를 두고 어디 갔소/쑥국소리 목이 메네’

<민영의 ‘엉겅퀴 꽃’에서>

보랏빛 엉겅퀴 꽃.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날 때 찧어 바르면, 금세 피를 엉기게 하는 엉겅퀴. 나물로 먹고(가시나물), 된장 고추장에 박아 장아찌로 먹는 풀. 민영 시인의 고향은 철원평야 비무장지대(DMZ) 안쪽 월하리(·달 아랫마을)다. 그 바로 아래가 지금 남아있는 ‘달 우물마을’ 곧 월정역()이다.

○ 천년을 살며 푸른빛의 청학이 되는 두루미

궁예길 한탕강 코스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승일교∼직탕폭포(4.8km)로 가는 짧은 코스. 그곳에서 곧바로 택시(1만 원 정도)나 승용차를 이용해 도피안사로 가면 된다. 또 하나는 직탕폭포에서 대위리까지 6.4km를 더 거슬러 올라가는 긴 코스다. 역시 대위리에서 택시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 도피안사∼노동당사∼백마고지기념관 코스는 민통선 밖이라 통행이 자유롭다.

광복 이전 철원은 한반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철원∼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전철(116.6km·1931년 개통)까지 있었다. 금강산전철은 24개 역이 있었으며 3시간이 걸렸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2시간(101km)을 달려와 구름다리로 이어진 철원역에서 ‘금강산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금강산전철 노선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두루미는 민통선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다. 민통선 안에 들어가려면 군부대 허락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절차가 필요하다. 두루미는 우아하다. 새에게도 격이 있다면, 그 격이 여느 새와 한 차원 다르다. 두루미는 군자 같은 새다. 낟알을 주워 먹으면서도 촐랑대지 않는다.

철원평야 두루미는 흰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대부분이다. 흑두루미는 어쩌다 가끔 보인다. 두루미는 보통 1m가 넘는다. 다리는 영덕대게처럼 가늘고 길다. 겅중겅중 걸음걸이가 태껸자세 같다. 한복차림의 조선 선비가 양반걸음으로 휘적휘적 걷는 것 같다. 퍼덕거리는 큰 날개는 영락없는 선비의 휘젓는 도포자락이다.

수놈이 바리톤으로 ‘뚜∼’ 하고 울면, 암놈들이 “뚜루∼뚜루∼” 소프라노로 맞장구친다. 철원평야의 오아시스 샘통 부근에 많다. 샘통은 1년 내내 얼지 않는 우물. 부근엔 동송저수지도 있다. 대머리 검독수리는 토교저수지에 많다. 요즘 토교저수지는 얼어붙어 두루미가 잘 가지 않는다.

흰 두루미는 크고 민감하다. 재두루미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둔감하다. 흰 두루미들은 사람 기척만 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린다. 경계병의 날카로운 “뚜루∼”소리가 그 신호다. 반공중으로 편대를 지어 날아가는 두루미 떼는 황홀하다. 두루미는 학()이다. 흰 학은 천년을 살면 푸른빛의 청학이 된다. 그 청학이 산다는 곳이 바로 이상향 청학동이다. 청학이 다시 천년을 살면 검은 현학()이 된다.

‘천년 맺힌 시름을/출렁이는 물살도 없이/고운 강물이 흐르듯/학이 난다.//천년을 보던 눈이/천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노나.//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초목도 울어야 할 설움이/저리도 조용히 흐르는 구나’ <서정주의 ‘학’에서>

철원은 궁예의 나라이다. 어딜 가나 궁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철원평야 동남단엔 궁예 부하들이 슬피 울었다는 울음산(·명성산·해발 923m)이 있다. 궁성터로 정하려 했던 천황지() 마을, 왕건에게 쫓기며 한탄했다는 군탄리, 동쪽에 막사를 설치했던 동막리, 궁예가 한숨을 쉬었다는 한잔모텡이골, 태봉국의 골(·관)이 있었던 골말, 군량()과 관련된 굴랑꿀, 궁예군사들의 훈련성터였던 성머리….

궁예도성은 DMZ 숲 속에 누워 있다. 직사각형의 황성옛터는 달빛만 고요하다. 궁예 시절 ‘한탄강 돌에 좀이 슬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던가. 궁예도성 돌들은 푸른 이끼가 지쳐 굴 딱지가 되었다. 푸른 학이 깃들여 사는 ‘천년왕국 청학동’이 되었다.


▲ 좌측에 흐르는 풍천원 물은 궁예의 태봉국 도성에서 흘러 내려온것이다. (2010.04.16 촬영)

▲ 남북 분단으로 비무장지대(DMZ)에 갇혀 있는 태봉국 궁예왕의 도읍지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실물 모형(가로 6.4m, 세로 5.2m)이 6일 강원도 철원군청 현관에 설치됐다. 이 모형은 인공위성 사진과 일제시대 유적조사자료, 분단이전까지 살던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됐으나 정확한 제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남북 공동발굴 등이 시급하다.

 

▲ 북쪽에 있는 고려국(왕건)전의 궁예의 나라 태봉국 도성부지(풍천원 북쪽의 철원평야)

 

철원 DMZ 내에 잠들어있는 궁예의 나라 태봉국 도성부지 일대를 한눈으로 둘러봤다. 
태봉국 도성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905년)하면서 쌓은 성으로 외성, 내성, 왕궁성의 3중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성 전체가 DMZ에 위치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던 까닭에 연구자들은 자료수집에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고한다.. 일반인에게도 태봉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라.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DMZ 현지조사와 일제강점기 자료를 모아서 찾아낸곳 부지전체를 똑닥이 디카로 잡아본 동영상이다. 

이번 주목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철원지역 지적도에서 태봉국 도성의 윤곽을 확인한 것이다. 이 자료는 그동안 조사및 공개된 바 없는 것으로,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지적도(1:1,200)를 협조받아 분석해서 확정한 것이라고 한다.

태봉국 도성의 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됐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외성둘레 1만4421척(약 4500m), 내성둘레 1905척(약 600m)으로,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는 외성둘레 약 6000간(약 1만909.1m) 내성둘레 약 400간(약 727.3m)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번에 도성의 형태가 남북으로 기다란 직사각형을 띠고 있으며, 외성 약 1만2306m, 내성 약 765.6m임이 확인됐다. 이 자료는 현재의 인공위성 사진및 1950년대 항공사진과 함께 태봉국 도성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향후 현지조사 시 핵심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자료집을 통해 2008년 DMZ 내 현지조사를 실시하면서 수집한 자료들과 현지에서 조사한 내용도 살펴볼 수 있었다. DMZ에는 아직 보고되지 않은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 태봉국 도성은 한 나라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고대와 중세의 도성 형태나 운영체제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철책선 너머 궁예도성

◇영원한 평등세계를 지향한 궁예=“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였기에 평양 구도(舊都)는 묵어서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 궁예전)

철원(구철원·896년)에서 송악(898년)으로 천도한 풍운아 궁예는 901년 외세(당)에게 허망하게 멸망한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다.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성을 고(高)씨로, 활 잘 쏘는 주몽의 후예라 하여 이름을 궁예(弓裔)로 고쳤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제 고구려에 머무르지 않는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칭한다. 1년 뒤에는 다시 철원(구철원에서 30리 북방인 풍천원 벌판)으로 옮긴다. 마진은 ‘마하진단’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결국 궁예는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백제,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의 건설을 꿈꿨던 것이다. 철원 재천도 이후 청주인 1,000호를 이주시킨다. 궁예가 이토록 청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해가자 ‘고구려만의 부흥 세력’의 박탈감은 컸다. 황해도와 경기북부의 호족들은 왕건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만다(918년).

당초 궁예는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뭇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했다”(삼국사기)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역사의 패배자가 된 그는 의처증에 시달려 달군 무쇠방망이로 부인의 음부를 쳐서 죽인 정신병자로 폄훼됐다. 과연 그럴까. 궁예는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바꾼다.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며, 봉(封)은 봉토의 뜻이다.

결국 궁예는 국호를 통해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 즉 대동방국의 건설을 염원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이같은 웅지를 품고 동방을 한꺼번에 아우르겠다는 야심찬 국가건설 목표를 세운 이가 있었을까.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보다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편이 더 낫다. 독사와 전갈은 피할 수 있지만 비겁한 인간은 피할 수 없다”고 설파한 궁예의 진면목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군사분계선을 반으로 나눈 도성=“어마어마한 들판이었어요. 궁예왕이 왜 도읍지로 이곳을 택했는지 금방 이해가 됐어요.” 지난 2001년 5월 궁예왕의 야망과 좌절이 묻어있는, 강원 철원군 풍천원 벌판을 답사한 이재 육사교수의 회고다.

궁예도성은 어쩌면 그렇게 ‘슬픈 궁예’를 닮았을까.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된 궁예도성. 1917년 일제가 작성한 지도와 51년 찍은 항공사진, 91년 재작성한 지도를 토대로 보면, 도성은 군사분계선을 거의 정확히 반으로 나눠 반쪽은 북한, 반쪽은 남한 땅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로가 동서로 도성을 잘라 놓았다. 도성은 동서로, 남북으로 잘린 애처로운 형국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방한계선 안으로 들어가 궁예도성을 조사한 이재씨의 말.

“수색대의 인도에 따라 좁디좁은 수색로를 걸으며 도성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어요. 너무나 평화로운 들판의 광경. 고라니가 바로 코 앞에서 뛰놀고…. 깜박 달려가 안고 싶은 충동을 느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러나 좁다란 수색로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른다. 1,100년이 지나도록 버려진 땅이 된 궁예의 옛터는 이제 딱 반으로 쪼개진 남북분단의 아픈 상징이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일제시대 자료를 보면 궁예도성은 외성이 무려 12.5㎞, 내곽성은 7.7㎞에 달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전체 둘레 3.5㎞), 신라의 경주 월성(1.8㎞), 고구려의 국내성(2,7㎞)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궁예의 대동방국 건설이 얼마나 야심찬 프로젝트였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힘든 일은 끊일 새가 없으니 원망이 일어났다”(고려사)는 왕건의 평가는 궁예도성의 규모가 컸고 백성들의 노역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1년 조사결과 성벽의 대부분이 붕괴되긴 했지만 그래도 도처에서 잔존부분이 확인됐다. 남대문지는 아카시아 군락을 이루고 있는 채 확인됐고, 경원선과 외성 남벽이 만나는 지점은 높이 1m, 길이 50~60m의 성터가 남아 있었다. 외성남벽 서쪽 부분에는 길이 20m, 하단 폭 6~7m, 높이 3~4m의 토성이 확인됐고, 내성남벽의 경우 길이 400~500m 정도의 토성이 연결됐다.

외성동벽은 130m 가량이 남아 있었는데 가장 확연했다. 하지만 온통 지뢰라 더이상의 조사는 어려웠다.
앞으로도 확인할 게 너무 많다. 북한쪽, 이른바 삼방(三防)의 협곡에 남아있을 궁예왕릉은 물론 외성의 남대문지, 궁궐터, 미륵전, 궁궐터와 남대문지 앞에 쓰러져있다는 석등 2개(일제시대 국보 118호)와 봉상리에 있다고 알려진 귀부 등….

◇궁예성 남북공동발굴은 통일의 시금석=지난 2001년 7월 평양에서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이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경운기 100대를 전달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교류에는 더욱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군사 분계선의 남북에 걸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궁예도성의 공동발굴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 도성의 공동조사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민족의 동질성을 찾기 위해서는 정치·경제분야뿐 아니라 고고·역사학계에서도 남북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교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가장 상징적인 유적이 궁예도성인 것이다. 궁예가 애초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웠고 따라서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고려로 정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현 북한정권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궁예도성의 공동발굴은 남북 화해의 시금석이 될 것이고 나아가 비무장지대의 성격을 바꿈으로써 앞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남북이 함께 풀어가야 한다면 궁예도성 발굴은 그 문제를 푸는 첫번째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궁예왕이 이미 9~10세기에 고조선·숙신(만주 및 연해주)·고구려의 옛땅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우리 땅’으로 보았다는 것을 남북공동연구로 알려야 한다.

이미 금강산 육로관광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서울~원산간 경원선도 다시 연결될 게 분명하다. 만약 경원선이 기존의 노선(궁예도성을 잘라버린)대로 복원된다면 궁예도성은 다시 한번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꼴이 될 것이다. 이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조유전/고고학자〉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하기


1. 철원의 상징 인물인 임꺽정 형상.
2. 남한 최북단 산인 복계산 곳곳에는 녹슨 철조망이 보여, 복계산의 현주소를 실감케 한다.
3. 철원팔경 중의 하나로 궁예의 전설이 남아있는 삼부연 폭포. 

 


1 철원의 대표 명소로, 궁예의 한과 한민족의 아픔이 남아있다는 한탄강 전경.
2 근현대사 유적중의 하나인 금강산 철도 교량에는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킬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3. 철의 삼각전적관 앞에는 6.25때 사용된 탱크, 비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4. 북한과 남한에서 합작으로 만들었다는 승일교 전경.
5. 민통선 안의 최북단 마을 ‘통일촌’과 통일촌교회.
6. 민족 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철원 노동당사 전경.
7. 전 세계 전쟁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3년 동안 24번이나 주인이 바뀔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백마고지 전적지 기념탑.

 

▲ 일명 나이아가라 Niagara 폭포 라고도 한다. (高 2.5m....ㅎㅎㅎ)

 

▲ 삼부연 폭포 (원본) 

 ▲ 고석정 정자에서 카페지기

 

 ▲ 철새 도래지 (철원평야) 방문 당시는 겨울 철새가 전부 떠나고 없어 퍼다가 옮김

  ▲ 지하 150 M에 있는 철원 제2 땅굴 모습,,,,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중

  

|트레킹 정보|

◇가는 길

▽승용차 △서울∼의정부 포천방향∼동부간선도로나 국도 43호선∼의정부 포천방면∼운천∼검문소∼신철원 △서울∼올림픽대로∼구리요금소∼퇴계원 일동방면 국도 43호선∼포천 운천방면 국도 43호선∼검문소∼신철원

◇민통선 출입시간
▽출발시간(자가용)=△동절기(11∼2월): 09:30,10:30,13:00,14:00(4회) △하절기(3∼10월): 09:30,10:30,13:00.14:30(4회) ▽25인승 이상 버스(20인 이상 탑승)=△동절기: 09:30∼14:00 개별 출입 가능 △하절기: 09:30∼14:30 개별 출입 가능 ▽휴관=매주 화요일, 어린이날, 명절(설날, 추석)

◇철새탐조
▽기간=겨울철 ▽코스=토교저수지, 평화전망대, 아이스크림고지, 철원두루미관 월정역사 ▽출발=고석정국민관광지(한탄강 관광사업소) ▽신청=단체 버스만 가능. 전화 예약 ▽예약처=철원군청 관광문화과(033-450-5365) 15∼20인 이하 신청 시 취소될 수 있음 ▽출발시간=매주 수, 토, 일요일 ▽문의=철원군청 관광문화과, 전적지관광사업소(033-450-5558).

◇먹을거리
△숯불민물장어 전문점 ‘잠곡댐’ 033-458-4969 △송어회 전문 ‘매봉산장’ 033-458-1959 △한우 전문 고석정 옆 ‘궁예도성’ 033-455-1944


 

출처 : minoksigi
글쓴이 : 미녹시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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