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철원

갈말 토성리 고인돌 축조 이야기

달림토미 2009. 4. 2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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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가 맛본 세상이야기 |
갈말 토성리 고인돌 축조 이야기

철원신문 2009-01-22

http://cheorwon.newsk.com/
  
   철원군 선사유적으로는 장흥리 포사격장 일대 구석기 유적, 군탄리 농공단지 입구 바위그늘 신석기 유적과 토성리 청동기시대 고인돌 및 각종 토기파편 등을 들 수 있다.
  2006년 제16회 강원도 향토문화 연구발표회에 참가하기 위해 <철원지역 고인돌사회 복원연구>라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철원군에는 토성리 제1호 고인돌을 위시하여 문혜리 추정 고인돌까지 포함 총 19개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고인돌이 무덤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부족을 이끌던 족장이나 지배자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부족의 수호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인돌 크기가 초창기에서 후대로 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아 힘 있는 절대 권력자가 등장하여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가진다.


  그럼 그 큰 돌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주변에 있는 것을 그냥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전문 채석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운송한 것인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도대체 옮겨 왔다면 어떤 운반수단을 이용했을지도 의문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고인돌 무덤을 만드는데 여러 날이 걸렸을 텐데 그 사이 주검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여름날이나 장마철에 일을 당하면 부패가 심했을 것이고 겨울에는 땅이 얼어붙어 채석, 운반, 축조 작업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미리 빈 무덤에 해당하는 고인돌을 미리 만들어놨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증은 더해간다.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다.   고고학은 참으로 재미있는 학문이다.


  실험고고학 분야 연구자들이 고인돌 운반과정을 재현했다.   선사시대에는 아직 수레나 바퀴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커다란 덮개돌 밑에 둥근 나무를 깔고 덮개돌에 줄을 연결하며 여러 사람들이 끌고 밀고하여 운반했다.   굄돌 위에 덮개돌을 올리는 것은 흙으로 미리 굄돌을 묻고 덮개돌을 끌어 올린 다음 흙을 다시 파서 없애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실험결과 성인장정 한사람이 100kg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토성리 1호 고인돌의 크기와 두께, 재질을 감안하여 무게를 역산하면 적어도 7~8톤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고인돌 운반 작업에 최소한 성인장정 70~80명이 참여하였을 것이고 이래저래 전체 축조작업 동원인력은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선사시대 당시 성인 평균 수명 20~30세, 가족 구성원 4~5인이라는 연구 결과에 따라 가구당 1명씩 차출되었다고 감안하면 당시 토성리 인근의 정착인구가 500여명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현재 토성리 인구가 약 130세대 650명이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철원 땅에 지금과 비슷한 규모의 공동체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철원군 인근에서 토성리 고인돌 규모의 고인돌은 이동 수입리나 포천 선단리, 전곡 양원리 등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고인돌 분포에 따라 마을 분포를 상상해보면 선사시대 철원의 규모와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 추측된다.   고인돌은 사회구조가 이동수렵채집사회에서 정착영농사회로 변화되었다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크기는 마을 지배자의 영향력에 비례한다.    좀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철원군 일대 반경 4km 이내를 호령하는 실권자가 갈현고개 넘어 남대천변 토성리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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